鄭洋의 홈



정양 선생님 유고시 7편
작성자 : 김경운 


진달래만 없다(외 6편)

정양


나 사는 아파트는 이름이 피오레
피오레는 이태리말로 꽃이라고 한다
이름 값하느라고 이 아파트 뜰에는
갈 봄 여름 없이 온갖 꽃들이
철 따라 피고 지는데

철들면서부터 늙어버린 지금까지
봄마다 철없이 나를 들뜨게 하는
그 진달래만 없다

진달래만 없는 이 적막한 뜰에서
나는 오늘도 철없이
진달래만 그립다




바람이 나려거든


바람이 나려거든
우물쭈물 비실비실
쪼잔하게 나지 말고
동네방네 소문나버리게
꼭 이렇게 화끈하게 나버리라고
호젓한 과수원길 복사꽃들이
화들짝화들짝 피었습니다

그 복사꽃 아래
산비둘기 한 쌍
바람이 나려거든 감쪽같이
아무도 몰래 나야 꿀맛이라고
후닥닥 두어 번 사랑을 나누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리멀리 날아갑니다




옹달샘


깊은 산속 옹달샘
세수하러 왔다던 토끼

옹달샘 가 풀숲을  
잘근잘근 깨물어 옹달샘
들뜨게 해놓고

세수는커녕 철푸덕철푸덕
물장구치기는커녕

물만 먹고 가버린
물만 먹고 가버린

물만 먹고
그냥 가버린 토끼를
옹달샘은 두고두고
야속하게 여긴답니다




분리수거


분리수거 좀 제대로 해달라고
짜증 섞인 관리실 방송이 웅웅거린다  
누구더러 쓰레기를 수거해 달라는 건가
분리수거 잘 되도록 쓰레기 좀
제대로 버리라는 말이겠지만
들을 때마다 은근히 짜증나던데

쓰레기들 대충 버리고 왔더니
웅웅거리는 소리에 짜증내듯
거실에서 혼자 주절거리던 티비가
분리수거는 꼭 이렇게 해야 한다는 듯이
구속되는 전직 여자 대통령 하나
야무지게 분리수거되는 걸
볼륨 높이며 생중계한다

쓰레기 말고도 이 세상에는
분리수거할 게 차고 넘치는지
분리수거 좀 제대로 해달라고
짜증 섞인 방송이 또 웅웅거린다




매화


여기 코로나 속 경기도땅
백신도 못 맞고 피는
창 너머 매화꽃들이

사람들 만나서
댐배 피고 먹고 마시고
노래허고 지랄허든 일들이
얼매나 소중허고 찬란혔더냐고

낯익은 말투로  
쓸쩍 귀띔을 한다




물약


언제부터 눈물샘이 말랐는지 모르겠다
눈알이 자꾸 뻐근거려 고개 젖혀 물약을 넣는다
볼을 타고 흐르는 물약에 문득 숨이 막힌다
눈물 흘린 기억들이 숨 막힌 눈알에 핏줄에 꽂혀
따끔거리는 눈알이 샘솟듯 물을 흘린다
콧날이 자꾸만 못 견디게 시큰거리고
아직 물약 안 넣은 눈알도 덩달아 줄줄줄 물을 흘린다
눈물이 슬픔이 절망이 뉘우침이
더러는 물약 먹어 이렇게 줄줄줄 따뜻하구나  
화살촉처럼 꽂히는 달빛이 온몸에 두근거린다




한 치 앞에


지금은 때가 아니니
기다려달라고 해도
어차피 줄 거 깡그리
벗고 주려고 작심했는지
막무가내로 성큼 봄이 와버렸다
앙심먹은 봄눈이 천지간에
휘날리거나 말거나
이러다 거덜나지 거덜나지 싶은
아슬아슬한 한 치 앞에
제 버릇 개 못 주고
눈깜땡깜 일 저지르고 보자는
철모르는 봄바람 분다  
                      -『내일을 여는 작가』, 2025년, 가을호.











[2026-05-06 13:41:06 에 등록된 글입니다.]



Copyright 1999-2026 Zeroboard / skin by